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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눈물, 상사화
2019년 10월 04일(금) 15:26
▲서길원 大記者(대기협 순천시지회장)
"가을이 섧게 느껴지는 것은 상사화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섧음에 겸허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가을의 상사화는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마음 없이 어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쓸쓸하고 서늘해서 더 좋은 우리의 가을이다. 가진 것 없어도 가득차고 또 가득 찼던 것 비울 수 있는 가을이다.

그 가을의 눈물 한 방울이 어느 날 집 앞 울타리에 떨어졌다. 여름이 지나고 또 추석명절이 지나고 순천만의 갈대마저 갈색으로 물들어가던 날, 집 앞 울타리에 상사화 몇 송이가 붉은 울음으로 피어났다. 잎이 시들어 사라진 다음에야 꽃을 피우는 특성으로 잠깐 잊었었는데 가을바람은 어김없이 상사화를 앞세우고 찾아 왔다.

상사화(相思花). 잎이 틔울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피울 때는 잎이 없어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하는 꽃. 상사화를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이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가을에 이보다 더 섧고 아름다운 사연의 꽃이 어디 있으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 말에 이르면 상사화는 어느 시절의 인연으로 되살아나 우리들의 가슴에 화인이 되곤 한다.

상사화는 2가지 버전의 전설을 안고 있다. 같고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한국과 중국의 전설은 애틋하기만 하다. 먼저 우리나라의 전설이다.

오랜 옛날, 어느 절에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며 백일기도하러 온 처자가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이 절의 큰 스님을 모시던 젊은 스님의 마음에 처자가 찾아들었다. 처자를 사모하는 스님의 가슴앓이는 온통 붉은 빛으로 타들어 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처자는 백일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가버렸다.

‘그녀는 그렇게 떠나고’ 스님은 절 뒤 언덕에 올라 하염없이 처자를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죽고 말았다. 전설이 흔히 그러하듯 그 이듬해 봄에 절 뒤 언덕의 스님 무덤가에 없던 풀 잎 하나가 싱싱하게 솟아 올랐다. 여름이 지날 무렵 풀잎이 시들어 사라지고 나니 불쑥 꽃대 하나가 올라와 붉은, 그러나 갈래갈래 찢어진 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그 꽃을 보고 세속의 여인을 짝사랑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스님의 애절한 사랑이 깃들었다며 ‘상사화’라고 불렀다.-

한국의 전설은 상사화가 스님의 마음이 피어낸 꽃이라고 한 반면 중국의 전설은 비련의 주인공이 스님에서 처자로 바뀐다.

-애지중지 외동딸을 키우던 약초 캐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먼 조선 땅에 먹으면 장생불사한다는 불로초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으로 갔다. 그는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죽었다. 외동딸은 아버지가 “내가 무슨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하면 네가 불로초를 찾으라”는 유언에 따라 조선으로 떠났다.

외동딸은 조선의 어느 절에서 스님을 만나 ‘불로초보다는 도를 깨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작은 암자에 머물러 도를 닦게 됐다.

어느날 큰절에 갔다가 젊은 스님을 보고 그만 마음을 빼앗겼다. 처녀는 용기를 내서 스님께 사랑을 고백했으나 ‘불자의 몸으로 여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만 듣게 됐다. 아버지의 유언도 이루지 못하고 사랑까지 거절당한 충격으로 외동딸은 죽고 말았다.
여인이 죽은 자리에 잎이 없는 꽃이 피더니 다음 해 꽃이 지자 잎이 돋아났다. 사람들이 처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꽃으로 피어났다하며 ‘상사화’라 했다.

가을이 섧게 느껴지는 것은 상사화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섧음에 겸허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가을 하늘에 뭉게구름이 있다면 가을 정원에는 상사화가 있다. 가을의 상사화는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마음 없이 어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이런 상사화를 두고 ‘상사화다!’, ‘아니다, 꽃무릇이다!’하는 논쟁이 이맘때면 일곤 한다 . 누구는 ‘7-8월에 피는 분홍빛 꽃이 상사화이고, 8-9월에 피는 붉은 꽃은 꽃무릇이다. 꽃무릇은 석산이라고 한다.’며 구분하지 않고 상사화라 부르는 이들을 점잖게 꾸짖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둘 다 아스파라가스 목, 수선화 과, 상사화 속이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찰벼든 메벼든 벼라고 부르고 흑인이든 백인이든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상사화이면 어떻고 꽃무릇이면 어떤가. 상사화이건, 꽃무릇이건 그런 논쟁에는 휩쓸리고 싶지는 않다. 필자의 몫도 아닐 뿐더러 논쟁의 가치가 이 꽃의 가치보다 크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상사화에 얽힌 중국의 전설이 원조냐, 우리의 전설이 원조냐 하는 것 만큼 의미 없는 일이다.

다만 붉은 상사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에 전설 하나쯤은 가을바람에 부대끼고 있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상사화 만발하는 이 가을에, 끝내 고백하지 못한 어느 시절, 당신의 이야기도 삭고 삭아 지금쯤 전설로 익어가고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지금쯤 전라도 절들에는 상사화가 흐드러지고 있을 것이다. 꽃무릇이 붉게 물들고 있을 것이다. 고창의 선운사며 함평의 용천사며, 영광의 불갑사며...

세상사 버거운 짐, 하루쯤 내려 놓고 당신의 가슴에 상사화 한송이 틔운다 한들 세상이 뭐 어쩌겠는가. 훌쩍 가을바람처럼 상사화의 전설에 빠져 볼 일이다.

꼭 유명한 사찰일 필요는 없다. 어느 길가 양지쪽에 당신을 기다리며 붉은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상사화도 하나 쯤 있을 테니.
그렇다고 사랑하는 이에게 상사화를 선물할 일은 아니다. “당신과 나는 아닌가벼!”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한 일이다.
기자이름 대한기자협회 광주전남협회
이메일 jgkorea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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